[송진희의 人사이트 #8] 여성운동의 롤모델, 故 壽松堂 이희호

송진희 기자 / 기사승인 : 2019-06-12 09:58:22
  • 카카오톡 보내기
  • -
  • +
  • 인쇄


6·10 민주항쟁 32주년이 되는 날, 밤 늦게 故김대중 전 대통령(호: 후광 後廣)의 부인 이희호(호:수송당 壽松堂)여사가 향년 97세로 소천(召天)했다.

이 여사는 유언에 "우리 국민이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자신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씀했고, 우리 국민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"고 한 데 이어 “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,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"고 말씀했다. 이 여사는 또 "서울 동교동 사저를 ‘대통령 사저 기념관’으로 사용하고, 노벨평화상 상금을 대통령 기념사업 기금으로 사용하라"는 뜻도 남겼다.

故이희호 여사는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 낸 '민주화 운동가'이자 '재야의 정신적 지주'였으며, 여성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을 고민하는 '여성운동가'였다. 고 김 전 대통령의 아내를 넘어 '정치적 동반자'였다. 군부독재 시절엔 후광을 비롯한 민주 투사들과 함께 민주화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. 고인은 11일 공개된 유언에서도 "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"고 밝힐 만큼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다.

1922년 의사 집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 이화고등여학교(이화여고 전신)·이화여자전문학교(이화여대 전신)·서울대 사범대를 거쳐 미국 램버스대와 스카렛대에서 유학한 이른바 '신(新)여성'이었다.

수송당과 후광의 만남은 ‘청년사업가’ 출신인 김 전 대통령에게 여성계와 중앙정치 인사들을 소개시켜 주고 싶었던 김정례 전 보건사회부 장관 덕분에 이뤄졌다. 1951년 1ㆍ4 후퇴 때 해운업을 운영하는 ‘젊은 사업가 김대중’이 인천에 물건을 내리고 돌아가려 할 때, 김 전 장관이 피난민을 태워 달라고 부탁했고, 김 전 대통령은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 주었다. 그 인연을 시작으로 김 전 장관은 전남 목포에서 활동하던 김대중씨를 중앙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많은 여성운동가들을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가졌다. 이후 김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을 만나러 부산으로 내려갔고, 김 전 장관은 식사 자리에 이 여사를 데리고 나갔다. 이런 자리가 몇 번 이뤄졌고, 세 사람은 사회문제를 토론하는 공부모임을 갖기도 했다. 


독신으로 여성 운동가의 길을 걷던 고인은 1962년 후광과 운명적인 결혼을 하면서 제2막 인생을 시작했다. 이 여사는 후일 "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됐다"고 회고했다. 

후광과 운명공동체였던 수송당은 남편의 굴곡진 삶을 함께 걸었다 . 김 전 대통령은 결혼한 지 열흘 만에 '반혁명 혐의'로 체포되었고, 고인의 내조 덕에 1971년 대선에서 정적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맞붙을 수 있었다. 이 여사는 찬조연설에서 "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"며 지지를 호소했다.

낙선 이후 군부독재 시절의 눈엣가시였던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시작으로 '미국 망명(1972년), 납치사건(1973년), 가택연금과 투옥(1973∼1979년), 내란음모 사건과 수감(1980년), 미국 망명과 귀국 후 가택연금(1982∼1987년)' 등의 온갖 고초를 겪었고, 이 여사도 이와 함께였다.

이 여사는 2008년 출간한 자서전 <동행>에서 "어둡고 쓸쓸한 감옥과 연금의 긴 나날들, 이국에서의 망명 생활 등은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"며 "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"고 회고했다.

후광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이 여사가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국제적인 구명운동을 펼치면서 후광의 아내를 넘어 정치적 동반자로서 각인되기 시작했다.

이후 1987년 6·10 민주항쟁으로 자유를 얻은 후광은13∼14대 대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,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.

약속을 번복했다는 비판 속에서 출마한 1997년 15대 대선에서 네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대통령의 꿈을 이뤘다. 이 여사는 자서전에서 "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남편의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"며 남편의 출마를 독려했다.
70대 후반의 고령에 청와대 안주인이 된 이 여사는 단순한 내조 역할을 넘어 남북평화·여성인권 등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퍼스트레이디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. 후광의 리더십과 노벨평화상 수상도 이 여사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. 고인은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 "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"이라 회고했다.

이 여사는 DJ가 2009년 8월 서거할 때까지 47년간 함께했다. 고인은 자서전에서 "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"며 "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"이라고 했다. 수송당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'민주·평화·여성·인권' 등에 대해 고뇌한 진정한 여성 운동가였다.

수송당이 후광과 김홍일 의원 곁에서 영원히 안식 하시길 기원한다.

[저작권자ⓒ 기업경제신문. 무단전재-재배포 금지]

오늘의 이슈

뉴스댓글 >

주요기사

+

PHOTO NEWS